30년 전 후방 고속도로변에서 총각 군의관으로 군대생활을 하던 나에게 명절만 되면 찾아오는 병이 있었다. 향수병이다. ‘엄마 보고픈 병’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병명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명절만 되면 비상경계근무 지시가 떨어졌다. 연대본부 의무중대장으로 매일 회의에 참석하다 보니 명절에, 특히 총각장교들은 영내 대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터라 ‘올해 추석은 절대로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추석 전날 저녁에 뜨는 둥근 달만 보면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마음이 들떠버리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속버스와 기차표는 이미 매진인 상황에서 집에 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군복입고 고속도로 출구 매표소까지 걸어가 ‘대전 가는 군인 한 사람 태워줄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승용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태우려 하지 않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화물차 운전기사는 방향만 맞으면 언제나 OK였다. 그래서 명절날만 되면 나는 20톤 이상의 ‘엄청나게’ 큰 화물차를 얻어 타고 울산에서 대전까지 여행을 했다.

엄청 큰 화물차는 밖에서 보기에는 괴물과 같은 모습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생각보다 아늑하다. 뒷좌석에는 침대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공간도 있고, 무엇보다 2층 높이에서 아래를 지나가는 승용차를 바라보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경험은 특별하다.

나를 태워준 화물차 기사들은 모두 인간성이 너무 좋았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휴게실에서 밥값이라도 낼라치면 ‘군인이 무슨 돈이 있는가’ 하며 밥도 사주었다. 커피도 한 잔씩 얻어먹었다. 공짜로 태워주는 것만 해도 너무 고마운데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대형 화물차는 추억이고 고마움이다.

두 달쯤 전에 화물차 기사들이 파업을 했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어서라고 했다. 나에게 그토록 살갑게 대해주던 사람들이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인간성이 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매스컴에 보도되는 기사를 보면 정말 열심히 일 하고도 살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다. 놀고 먹으면서 잘 사는 배짱이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삶이 힘든 개미가 많다는 것은 이 사회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배제되어야 할 양 극단이다. 열심히 일 하는 개미라면 당연히 겨울에 먹을 양식을 비축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사회 구조이다.

화물차 연대의 파업 사유 중에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항목이 들어 있다.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화물차 기사들의 주장에 동조한다. 같은 경험을 의사들도 겪었기 때문이다.

직장의료보험에서 지역보험까지 확대되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업주가 절반 부담하는 의료보험료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그 부분을 책임지겠다고 해서 의료보험의 통합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정부는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적이 없다. 그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금액은 고스란히 보험 가입자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의료보험료를 인상해야 할 요인이 발생하면 마치 ‘의사와 약사들이 돈을 너무 많이 벌어가기 때문에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뉘앙스가 들어가는 발언을 언론에 흘린다. 언제나 욕을 먹는 부류는 의사와 약사들이다. 같은 일이 포괄수가제 문제를 놓고 반복되면서 갈등이 있었다.

의사․약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그렇지만 타협과 협상의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 불신한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화물차 연대 파업도, 의사들의 반항도 결국 언론의 뭇매를 맞고 -그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 얘기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억울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줄어들어야 이 사회가 건강해질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 또한 간과하면 안 된다.

현존하는 사회적 제도에 대해 불만을 가진 집단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면 돌아오는 것은 여론의 뭇매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의 제도를 바꾸고 새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사회와 국민을 위한 길이 이것이다’라는 명분을 만들고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교훈을 배워야 하겠다.

김호택 원장
연세대 의대 대학원 의학과 졸업 /국제로타리 3680지구 총재/ 현) 금산 연세소아과 원장/ (주)삼남제약 대표이사/ 현)금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