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중식/본지대표

박근혜 정부출범 이후 서민들의 기대감이 부쩍 커진 부분을 꼽자면 단연, 복지정책이 꼽힌다. 일자리를 위시한 경제부문이야 역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회자가 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 나물의 그 밥’이라는 조롱이 나왔고, 정치문제는 늘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된 지 오래다.

하지만 정부조직개편이 마무리되면서 이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대선 전 공약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든다.
의료복지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민 누구나가 노인이 될 수 있고, 4대 중증질환을 비롯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식부양을 위해 고단한 삶을 살았던 기성세대에 대한 보답은 그들에 대한 복지에 달려 있다. 마땅히 벌어 놓은 것도 없는 세대로서는 아플 때가 가장 걱정이다. 자식들에게 기댈 수도 없다. 그들 또한 취업과 가정살림에 빠듯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의료복지공약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젠 40~50대로 불리는 중년층으로 화제를 돌려보자. 그들에게 있어 노후대책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지만 그럴 겨를이 없어 보인다. 하루가 멀다하고 오르기만 하는 물가에 허리가 휜다. 가계는 물론, 소규모 자영업을 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보겠다고 은행 문턱을 쉴 새 없이 들락거린 그들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높은 문턱 그 자체였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보다 높은 가산금리를 부담하면서도 대출이 되지 않아 제2금융권은 물론, 고금리 사채시장으로 내몰려야 했던 그들의 삶은 궁핍, 그 자체다.

이런 가운데 올들어 때 아닌 ‘희망의 소식’이 전해졌다. 정부가 오랫동안 빚을 갚지 못한 서민들을 위해 원금 일부를 탕감해주고 나머지 또한 저리로 전환하거나 분할해 주는 방식의 ‘국민행복기금’을 출범시킨다는 것이다.

‘돌려막기’를 하다가 포기해 버린 이들과 개인파산을 앞둔 이들에게 정부발표는 오랜 가뭄을 해결해 주는 단비와도 같이 들렸다. 하지만, 이 같은 꿈도 오래가질 못했다. 행복기금 출범을 앞두고 벌써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경우는 아니겠지만 빚 탕감을 기대하고 채무상환을 하지 않는 채무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실제 은행연합회가 집계한 3개월 이상 빚을 못 갚은 사람은 지난 1월 말 현재 123만9000명. 이중 6개월 이상 채무불이행자는 90%를 넘었다. 국민행복기금은 1억 원 이하 빚을 6개월 이상 연체한 다중채무자를 대상으로 원금을 50~70% 탕감해주고 나머지는 분할상환토록 하는 방식이다.

신규아파트 분양 중도금이나 입주 잔금으로 분류되는 집단대출은 연체율만 은행별로 2.0~3.5%에 이를 정도다. 이는 관련 통계가 집계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채무자들 사이에 ‘아니면 말고’식의 버티기 심리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최대 50%나 부채를 탕감해준다는 소식에 지금 갚으면 손해라는 인식이 확산 된 것이다.

물론, 마땅히 갚을 돈이 없어 문제인 부류가 부지기수일 터. 하지만 빠듯한 사정에 꼬박꼬박 높은 이자와 원금을 갚아 온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행복기금에 기대서 빚잔치를 하려는 악성 채무자들을 걸러낼 장치가 없는 한, 정부의 행복기금은 역설적으로 ‘불행 기금’으로 퇴색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단언하기에는 힘든 부분이지만 근본원인부터 살피지 못한 불찰에서 시작된 일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 그토록 많은 채무불이행자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내수경기 부양과 유동성확보를 위해 카드가입을 남발했던 일도 있을 것이고, 부동산 활성화를 위한 감세정책 또한 수 사례에 걸쳐 반복되어 온 기억이 새롭다. 그것이 단기적인 성과는 거뒀을 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더 큰 침체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일까.

단순히 말해보자. 빚을 진 사람이 오래토록 빚을 갚지 못한 원인을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의외로 간명하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일백 번 들어도 맞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책을 만들고 입법화하는 그들에게 되물어 보자. 그들이 왜 최소한의 이자조차 갚을만한 능력이 못되었는지를.

일자리가 줄어들고 물가가 오르면 가처분소득이 줄어드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다. 대기업에 몰린 현금이 돌지 않는 이유, 내집 마련의 꿈이 멀어지기만 하는 이유, 그것부터 살펴야 하는데 진단이 틀렸다면 처방 또한 달라져야 한다.

다시 행복기금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아무리 좋은 취지에서 서민들을 위해 만든 제도라도 형평성 문제를 최소화하는 것이 먼저다. 우선적으로 모든 저소득층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자리 대책과 서민 금융대책이 탄탄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선의의 채무자와 악의의 채무자를 가려내는 제도적 장치마련도 서둘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빚을 진 이유와 사용처, 그리고 그동안의 상환의지 등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

무주택 기간과 부양가족 등 제반항목을 데이터화해 점수를 차별하는 주택청약가점제 등도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연체기간과 이율, 금액보다는 소득대비 상환비율 등을 계량화한다면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국내의 한 민간경제연구원은 연체와 개인회생신청의 급증현상에 대해 ‘가계부실 심화’와 ‘도덕적 해이 확산’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것을 주문했다. 손익계산을 따져 가며 자신의 빚을 떠넘기는 부류와 먹고 사느라 불가피했던 부류를 걸러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이다.

국가예산은 한정된 마당에 정작 절박한 계층이 지원에서 소외된다면 그것은 행복기금이 아니라 불행기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을 다시 한 번 상기할 때다.

장중식/ 대전경제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