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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두유(豆乳)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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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2.18  22: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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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이 소년은 급사(給仕)였다. 황해도에서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공중목욕탕 심부름꾼부터 모자가게 점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의학강습소의 급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등사기를 밀어서 강습소 학생들이 볼 강의 교재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연스레 교재를 들여다봤죠. 용어가 어려워 옥편(한자 사전)을 뒤져가면서 독학을 하다 보니 ‘나도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의대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거든요.” 주경야독으로 의사고시에 매달린 지 꼬박 2년 그는 20세에 의사고시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국내 최연소 의사라고 축하해줬다. 시험에 합격한 해인 1937년 서울 성모병원의 의사가 되었다. 병원 생활은 평탄했지만 수십 년 뒤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 생겼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아오른 갓난아기 환자가 병원에 온 것이었다. “아이 엄마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아이를 업고 꼬박 하루 걸려 왔다고 했어요.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요. 차트를 보니 병명이 ‘소화불량’이었는데 아이는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의사도 아이를 살릴 수 없었다. 이후에도 복부팽만으로 병원을 찾은 적지 않은 신생아들이 설사만 하다가 무력하게 죽어갔다. 의사가 된 청년은 자책과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이 아이들을 언젠가는 고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이제는 유학을 가보자’ 43세였던 그는 의사 초년병 시절에 접했던 소화불량에 걸린 신생아들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의학 선진국으로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이때가 가장 큰 선택의 기로였다”고 회상했다. 주변에선 반대했다. 그에겐 아내와 6남매가 있었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도 보장돼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영국 런던대에 공부하러 갔지만, 별수를 찾지 못했다. 곧장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UC 메디칼 센터로 건너가 미국에도 비슷한 증상이 있나 샅샅이 뒤져봤지요.” 1964년 그는 도서관에서 소아과 교재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 lactose intolerance)’이 소개된 대목이었다. 20여 년간 지녀온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유당불내증은 우유나 모유의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증상을 가진 신생아는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고 만다. 우유 대용식을 만드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었던 콩국을 떠올렸고 그 길로 귀국했다. 이후 서울 명동에서 ‘정 소아청소년과’를 운영하며 아내와 함께 우유 대용식개발에 매달렸다. 아내가 콩을 맷돌로 갈아 콩국을 만들면 그는 콩국의 영양을 분석했다. 병원지하실에서 흰쥐에게 콩국을 먹이고 유당불내증이 나타나는지 실험했다. 주변에선 ‘그가 미국을 다녀오더니 이상해졌다’고 수군댔다. 이렇게 3년 연구 끝에 두유를 개발해냈고 이것을 설사병에 걸린 신생아에게 먹였다. 병상의 아이들이 기력을 회복했다. 콩에는 단백질 40%, 탄수화물이 35%, 지방 20%가 들어있지만, 유당은 없었다.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정소아과가 용하다’는 입소문이 나게 돼 전국에서 그를 찾아왔다. 이번에 환자가 몰리자 두유 수요가 달렸다. 결국, 정재원은 1973년 ‘정식품’이란 회사를 세워 두유 대량생산에 나섰다. 콩국이 식물성 우유라 하여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를 합해 “베지밀”이라고 불렀다. 당시 56세였던 그가 창업을 한 것이다. 그 후 130억 개의 두유를 생산했다. 서울-부산을 1630차례나 오갈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이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의 이야기다. 100세 수를 누렸다.

성모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할 때 부인 김금영 여사와 만났다. 고아였던 아내는 수녀원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후 성모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만났다. 박꽃처럼 예뻤다고 한다. 일본유학하고 귀국한 후 1942년에 결혼했다. 아내는 2004년 81세로 먼저 세상을 떴다. 정 회장은 턱시도를 입고 조문객을 맞이했고 아내의 관속에 흰색 면사포를 넣어주었다. 백발의 노신사는 아내에게 예를 다해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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